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하네스 오케겜 (문단 편집) == 생애 == 오케겜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단 출생년도부터 불확실한데, 연구자에 따라 빠르게는 1410년 이전부터 늦게는 1430년까지, 무려 20년 이상의 차이가 날 정도로 온갖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대략적인 출생년도는 1410~1425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설도 많다. 출생지 역시 정확하지 않은데, 그간 오케겜의 선조들이 살았던 동플랑드르 지역의 오케겜(Okegem)이나 덴데르몬더(Dendermonde)를 출생지로 추정하였으나 1993년에 그가 현재 벨기에 영역에 있는 생기슬랭(Saint-Ghislain)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16세기 문헌이 발견되면서 현재는 생기슬랭이 출생지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진 상황이다. 따라서 그의 모국어도 플랑드르에서 사용되는 [[네덜란드어]]가 아니라 [[피카르디어]](Picard)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생년도와 출생지가 이처럼 불확실하니 당연히 그가 어디서 자랐고 어디서 교육을 받았는지는 더더욱 알기 힘든 상황. 대략적으로 당시 생기슬랭에 있던 두 교회 중 하나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막연히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오케겜의 초기생애가 불확실한 이유는 오케겜 시대의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애에 대해 알 수 있는 당대의 자료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오케겜에 대한 당대의 기록은 1443년이 돼서야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를 최초로 언급한 이 문헌에서는 [[안트베르펀]]에 있는 옹즈 리브 브루베 성당(Onze-Lieve-Vrouwe Cathedral, 번역하면 우리 성모의 성당)에서 가수로 재직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문헌에서는 특이하게 그를 왼편의 가수(left handed singer)로 표현하고 있는데, 왼편이라고 명명된 가수는 성당에서 직접 작곡된 곡을 노래하고 오른편(right handed)이라고 명명된 가수들은 [[그레고리오 성가]] 등을 비롯한 전례 음악 부르는 역할을 맡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때의 오케겜은 노래와 더불어 작곡도 담당했던 것이다. 이 성당에 재직할 당시 오케겜은 [[존 던스터블]](John Dunstable, 1390~1453)을 필두로 하여 유럽대륙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영국식 음악양식과 기욤 뒤파이, [[질 뱅슈아]](Gilles Binchois, 1400경~1460) 등의 부르고뉴 악파의 음악을 접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어 1446~1448년에는 부르봉공 샤를 1세(Charles I, Duke of Bourbon)의 궁정음악가(가수 및 작곡가)로 재직했으며 1452년 경에는 파리로 옮겨서 프랑스 왕실의 악장(maestro di cappella)이자 [[투르]]에 있는 성 마르탱 대성당의 재무관과, [[파리(프랑스)|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참사회 의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프랑스 왕실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는지 프랑스 왕 [[샤를 7세]]와 후임자 [[루이 11세]] 밑에서 계속 궁정음악가로 활동했으며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도 직책을 맡았던 것이 확인된다. 오케겜은 궁정음악가뿐만 아니라 행정관리 직책도 맡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1460년대 후반에 프랑스왕의 사절로 스페인의 [[카스티야 왕국]]에 간 적도 있었다. 당시 오케겜은 카스티야 왕국에 프랑스와 사이가 나빴던 [[영국]] 및 [[부르군디 공국]]과 동맹을 맺지 말 것과 당시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였던 [[이사벨라 1세]]와 루이 11세의 동생인 베리공 샤를(Duke of Berry)의 결혼을 주선하기 위해 사절로 간 것인데, 결국 두 가지 미션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아시다시피 이사벨라 1세는 다른 결혼 제안을 모두 물리치고 1469년 이종사촌이었던 [[아라곤 왕국]]의 페르디난트 5세와 결혼하였다. 더 자세한 것은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오케겜은 1483년 루이 11세가 사망한 후 행적이 많이 드러나있지 않는데, 1488년 [[샤를 8세]]가 빈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목요일 세족례에 참석한 것이 공식기록에 나온 그의 마지막 행적이다. 이후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학자들은 말년의 오케겜이 대체로 부르게(Brugge)나 투르에 살면서 작곡과 음악교육에 종사하다가 1497년 투르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가 사망하자 그를 존경했던 많은 시인과 음악가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조스캥 데 프레]]의 샹송 '오케겜의 죽음에 대한 애가(Déploration sur la mort de Jean Ockeghem)'[* 장례를 위한 전례음악(Requiem Aeternam)을 정선율(cantus firmus)로 사용하고 장 몰리네(Jean Molinet)라는 시인이 오케겜을 애도하기 위해 쓴 시 Nymphes des bois(숲의 님프)를 가사로 사용한 작품이다.]는 매우 유명하다. ||[youtube(GlpyCoXFh_U, height=240, width=400)]|| ||조스캥의 오케겜의 죽음에 대한 애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